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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색당파의 생성과정과 그 계보 분석

Green Fields 2010. 9. 2. 11:34
사색당파의 생성과정과 그 계보 분석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들의 성격과 특징 분석 

西人과 東人의 분파를 보려면 근본적으로 그 이전 시기에 대하여 파악하여야 한다.
사림세력(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시골로 숨어 버렸던 온건파 신진 사류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까지 활동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그 세력이 조금씩 쇠퇴되었는데 조선 중기에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은 성종조부터 국가권력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4대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세력들이 대거 몰락을 한다...


이때 4대 사화 중 사림과 훈구세력이 싸운 실질적 의미의 사화는 戊午와 己卯 사화였고 甲子사화와 乙巳사화는 훈척신 내부에서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암튼 이 과정에서 사림이 대거 몰락하긴 하였지만, 모두가 몰락한 것은 아니다..
즉 사화에도 살아남은 사림도 있었다..
몇몇은 계속 관직에도 오를 수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의겸이 등장한다..
신의겸은 훈구세력이지만, 사림에 대해 상당히 관대하였다..
그래서 사림들이 신의겸을 통해서 중앙으로 많이 진출을 했다..
아직 이때에는 사림의 본격적인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아 별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선조대에 들어와서 사림이 대거 진출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림의 입장에서는 훈구세력들이 좋을리 없었다.
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이 옥사한 것은 물론이요, 당시 경제적으로도 사림의 경제력을 침해해 들어가던 세력이 기존 지배층인 훈구이니 사림 입장에선 좋을리 없었다..


이 문제에 신의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존의 사림 세력들은 신의겸을 옹호하였지만, 새로 등장한 사림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신의겸도 제거해야 한다는 논의가 전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사림세력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새로 등장한 사림은 상당수가 되었다..
결국 신의겸에 대한 처리 문제에서 이견을 보인 두 세력이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는 아직까지 학파적 기질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서경덕, 조식, 이언적학파 세력들이 대거 동인에 들어가면서 학파적 성격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학파가 동인에 들어간 것도 간단하게 보면 신진 사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 이유로 정파상으로도 학파상으로 동인세력은 16세기 말 정국을 주도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이는 스스로 서인으로 가겠다 하여 '서인자정'을 한다...
이이도 엄밀하게 따지면 동인쪽에 가까운데도 서인에 들어간 것은 붕당간의 세력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정치 역시 한족으로 너무 기울어질 것을 우려한 이이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동인 서인 나눠 진 것하고 이황 이이의 학문계승하곤 별개로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학문적 소양보다는 신진사림하고 구사림간의 힘싸움이었고... 그 와중에 서로 줄서기 한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나 똑같다고 본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소속의원들보면 자신의 정치적 성향보다는 본인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당을 결정하는 사람이 대다수 인 것과 흡사하다고 보면 될듯하다...
동인이 떠받드는 이황은 주리론의로 이론적 학문을 강조한 것이고
서인이 떠받든 이이는 실천적 경험적 학문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서인 계열이 분파 되는데 여기서 노론 소론으로 나뉜다.
 주로 조선후기까지 정권을 잡았던 노론은 실천하고는 거리가 먼 이론적인 학문을 강조하고, .소론은 실천적 학문을 강조하였다..
동인 서인의 나뉨의 가장 키포인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인 서인의로 줄서서 들어간 것이라고 판단되며, 
학문적 성향하고 관계없다는 가장 좋은 예가 동인이 섬겼던 사람들이 이황 서경덕인데 이황은 주리론자 서경덕은 주기론자로 줄서기를 한다....

최초의 붕당인 동인과 서인을 보면, 당시 동인의 우두머리 격은 김효원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집이 한양(사대문 안)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고, 
서인의 우두머리 격은 심의겸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집이 한양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서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넘어가는 사이 정여립의 모반사건등으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다시 나뉜다.
남인들은 당시 한양의 청계천이남(특히 남산골)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남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고, 북인들은 당시 한양의 청계천 이북(북악산기슭)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북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한편 서인은 숙종임금 재위중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다.
1680년 경신환국때 남인들이 벌을 받고 정권에서 밀려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서인세력은 남인들에 대한 처벌을 좀더 강력히 해야한다는 세력과 그 처벌을 다소 너그럽게 해야한다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당시 강경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였기 때문에 노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온건파는 주로 소장파였기 때문에 소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정조가 청류를 앞세우는 준론 탕평정책으로 기존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자 이에 찬반을 표현하는 파가 나뉘어지는데 이것을 시파와 벽파라고 한다.

시파는 청류 가운데서도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류가 다시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시파로 지칭되었다.
《정조실록》에 시·벽파의 분리는 정조 4년부터 있다가 12년의 정민시의 상소를 통하여 처음으로 시파와 벽파의 호칭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벽파가 왜 벽파라 불렸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정민시가 과거에 시파의 거두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천할 벽(僻)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고 사료된다.


 이황의 이기이원론은, 꽤 보수적이었고, 이이의 이기일원론은 상당히 개혁적이었다
단지, 이황을 파조로 받드는 남인은, 조선 숙종 때까지는 꽤 보수적이었다가 경종 때서부터, 개혁적으로 변질하였고,
이이를 파조로 받드는 노론은, 계속,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다.
북인은, 남명 조식 선생을 파조로 받드는 당파로써, 처음서부터, 인조반정 때,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매우 개혁적이었다.
소론은, 성혼 선생을 파조로 받드는 당파로써, 남인과 마찬가지로, 숙종 때까지는 보수적이었다가, 경종 때서부터, 개혁적으로 변질된다.
그러니깐, 동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개혁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서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두 다, 보수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맨 밑의 김효원이 강건적이고, 심의겸이 온건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김효원과 심의겸은, 동, 서 분당의 직접적인 당사자들이었다.
김효원은 동인의 초대 영수이고, 심의겸은 서인의 초대 영수였다.
김효원은, 신진 사림들을 정계에 진출시키려는 개혁파였고,
심의겸은, 명종의 왕후인 인순왕후의 남동생으로써, 외척이었고, 구 사림들의 큰 신망을 받고 있었던 보수파였다.


즉, 김효원의 동인은, 명종 때의 외척이나 공신, 척신들을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강건한 입장에 있던 세력들이었고,
심의겸의 서인은, 이들의 신속한 제거에,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던 온건한 입장에 있었던 선배 사림 세력들이었던 것다.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인 :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건천동에 있어서..(퇴계와 남명의 영남학파)
서인 :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어서..(율곡과 성혼의 기호학파)
북인 : 이발이 북악산 아래 살고 있어서..(퇴계학파 주류)
남인 : 우성전이 남산 아래 살아서..(남명학파 주류)
대북 : 이산해, 홍여순 등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라서..
소북 : 남이공, 김신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라서..
노론 :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라서..
소론 :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라서..
벽파 : 사도세자 모해파
시파 : 사도세자 보호파

 

사림 출신 스승 아래서 수학한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은 급격히 세력확장을 한다.
붕당성립기는 보통 1575년 전후 이황, 조식, 서경덕 학파의 신진관료들이 연합하여 동인당을 결성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이이는 동인이든 서인이든 모두 훌륭한 군자가 되려고 공부하는 선비들의 붕당이라는 조선적 붕당정치론을 개진하였으나 당시 서인은 학파적 바탕이 전혀 없어 붕당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의 소수파에 불과했다. 서인은 이이가 사망한 1584년을 전후하여 이이, 성혼학파가 합류하면서 비소로 붕당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붕당의 효시라고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 사건은 1575년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벌인 대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 견해이다. 이조전랑의 6자리 중 한자리를 놓고 벌인 설전으로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은 정 3품 당하관 이하의 관직을 뽑을 때 만장일치의 추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 사림의 여론을 대변해야하는 중요한 직책인 정요직을 어떤 방식으로 뽑을 것인가를 놓고 벌인 대립인 것이다.

김효원은 이조전랑 내부 동료들의 추천을 받아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인데 반해 심의겸은 동료추천제를 방해하고 그 자리에 자기 동생을 추천하였다. 결국 김효원이 승리하여 동료추천제 방식을 굳히게 되었고 그것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보존하는 것이 옳다는 사림정치의 원칙이 승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심의겸은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의 문객이라는 이유로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어릴적 부터 친한 김효원을 권력을 휘두르는 특권적 신하와 결탁한 자라는 이유로 배척을 하였고, 김효원은 명종의 왕후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을 특권적 권력자인 외척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싸움에서 사대부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사림정치의 원칙에서 보면 당연히 김효원의 견해가 맞다. 그 점은 이이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이는 이 문제를 옳고 그름의 시비문제가 아닌 견해를 고수하여 사림의 시대를 열어주고 적극 지원해준 심의겸의 공로도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폈다. 하지만 심의겸은 사림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훈구파의 인물이었다.

 

즉 구시대 인물이 신시대의 지도자로 탈바꿈 할수 있으면 서인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동인인 것이다.

동인은 심의겸으로 상징되는 구체제적 질서와 그 상징인 특권권력층을 사림정치에서 제거하자는 의견으로 초기 정통파와 실천파의 지지를 얻어 일찌감치 붕당을 이루었다. 반면 서인은 척신시대의 인물이라도 사림정치로 전향하면 새시대의 인물로 포용, 흡수, 변화시켜 주자는 의견이 서인인 것이다. 즉, 서인은 현실적 진보파인 것이다. 서인계의 당론서인 당의통략에는 처음부터 너무 깨끗하고 엄격하게 하다보니 피튀기는 살육전으로 변했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남인과 북인의 붕당은 대체로 1589년 기축옥사에서 찾는다. 기축옥사는 이이의 제자인 정여립이 스승을 공격하는 동인당에 가담하여 서인당을 공격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 쫓겨나게 되자 대동계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역모를 기도하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하지만 정여립은 체포도 되기 전에 스스로 자살하였고, 역모의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것을 역모의 정황증거로 삼아 그와 친하거나 편지왕래만 한 인물들에게 까지 확대가 되었다. 게다가 정작 역모고변은 황해도에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연루자로 죽은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전라도 출신이라는 수수께끼도 남아있다. 북인의 지도자 정인홍까지도 자신의 딸을 정여립 집안과 혼인시키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지만 딸이 없어서 무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철로 대표되는 서인계 인물들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발, 정개청, 최영경 같은 북인계 인물들을 무고하게 죽였음에도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분당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있다.

기축옥사는 당시 자료가 많이 인멸된데다 선조의 말 못할 사정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고 있다. 즉당파싸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견해, 반면 정감록과 같은 조선왕조 최초의 민중혁명이라는 견해 등 평가가 상반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림이 주도해야하는 정치를 군주인 선조가 (실력도 안되면서) 무리하게 주도하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돌발상황이라고 본다. 즉 선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조작한 정치적 이벤트인 것이다. 그 당시 역적으로 몰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선조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시기심이 많고 모질고 고집이 세다", "일을 같이 할 만한인물이 못 된다", "괴팍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견은 앞뒤 말이 맞지 않고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선조의 정치 스타일에 대한 평가였다.

 

결론은 단순하다. '군주의 권위가 위에 있는가? 사림의 공론이 위에 있는가?' 이다. 사림의 공론이 우위라고 보면 북인, 군주의 권위가 우위라고 보면 남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북인은 정여립의 옥사를 완전히 조작 날조된 사건이라고 본다. 보다 실천적인 서경덕, 조식 학파가 대주류를 이룬다.

반면 이 사건을 국왕에 대한 불경죄 부분을 긍정하는 쪽이 남인이다. 나라의 어른인 군주의 기본적인 권위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이황 계열이 여기에 속했다.

 

북인은 전제적 군주권 행사에 대한 대처방식의 대립으로 북인은 전제적 군주권이 야기하는 정치적 파행화는 공론의 우위를 확립하여 해결해야 된다는 의견인 반면 남인은 전제적 군주권이라도 공론에 대한 조제, 선택권은 일차적으로 군주의 권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노론과 소론의 붕당은 윤증과 박세채의 대담에 나온다. 소론은 서인과 남인의 원한관계를 해소하는데 노력하며, 청풍김씨, 여흥민씨, 광산김씨 세 외척 가문의 정치간여를 막고 '나를 따르면 군자, 아니면 소인' 이라는 송시열식 독단적 판단을 견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론은 그 반대로 외척을 반드시 차지하고 일당전제를 주장하였다.

 

결국 이런 결과로 일진일퇴의 환국정치가 이어졌고 군주는 군주대로 1당이 전권을 장악하는 정치운영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외척에게 군사권을 장악하게 해주었다. 또한 외척은 정치적 특권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궁중세력과 결탁하여 역모조작, 공작정치를 조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특권적 권력행사의 정치적 정통성을 보장받기 위해 송시열로 대표되는 일부 산림세력과 제휴하여 노론이 탄생한 것이다.

즉 노론은 학통의 연원은 충청도에 있지만, 결국 서울경기의 양반문벌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세력인 것이다.

 

당시 소론의 지도자 윤증이 자신의 아버지를 비난한 스승 송시열과 갈라선 것을 두고 '스승을 따라야 하는가 아버지를 따라야 하는가' 라는 식의 이분법적 난해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이 가속화 되어 조선사회 전반에 문도와 가문의 분열 현상을 야기하게 된다.

 

윤증은 이런 사회현상을 저지하기 위해 소론 붕당을 결성한 것이다. 하지만 박세채는 소론붕당을 결성한 것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그 대신 최초로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군주권을 강화하되, 군주가 관료인사권이나 군대통수권 같은 권한을 공평무사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해야한다는 의견이다. 박세채 사후 그의 제자들은 노소로 갈라졌지만 대체로 각 붕당 안에서 청류를 표방하였고 영정조년간 탕평정국의 추진을 적극 지원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보통 홍봉한의 북당과 김귀주의 남당이라는 두 외척당인 대립을 그 시작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 말년간에는 시파니 벽파닌 하는 정파는 없었다.

정조의 뜻을 따르면 시파, 아니면 벽파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이런 견해는 남인과 소론의 당론서에서 노론 주류 전체를 벽파로 간주한 견해에 불과하다.

 

정조년간의 시파와 벽파의 분열은 노론 청명당 내부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 것은 정조 8년 이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명당이 완전히 양분된 것은 아니다. 중도파도 있었다. 그리고 벽파의 영수로 지목되는 김종수 조차도 정조에게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집요했음을 인정하여 견해를 일부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반대로 시파의 영수로 지목되는 채제공도 김종수를 역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홍봉한은 노소론 외척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세칭 탕평당 관료의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이다. 이들이 바로 북당이다. 한편 정순왕후의 친형제 김귀주는 음서로 진출하였으나 관료로는 성장을 못하였고, 다만 정통 노론을 자처하는 호론 학통의 주류인 한원진 학통을 이은 송환억, 정이환 등과 가까이 지낸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은 노론 반탕평파에서 출발한 구상, 김상묵, 심환지 등을 차례로 끌여들여 노론 주류를 장악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이 북당과 남당이 정조년간에 바로 시파와 벽파로 바뀐 것도 아니다.

 

남당과 북당은 모두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왕위계승권자인 정조의 보호를 주장했다. 하지만 정조는 모두 권력에 눈이 어두워 정국을 혼란시키는 집단이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은 정략적인 표방일 뿐이라 판단 두 당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즉위 후 10년 안에 정계에서 제거해 버렸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영조의 정치적 처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차이이다. 벽파는 영조의 처분으로 확정된 신임옥사와 사도세자 문제는 결국 같은 정치원칙의 문제이므로 둘 다 강경하게 지켜야 한다는 쪽이고, 반면 사도세자 문제는 신임옥사와 별개로 처리하여 영조의 처분을 뒤집어야 한다는 쪽이 시파이다.

 

벽파는 정조초년 노론 집권 주류이던 청명당 정파 분열 시, 일부 남당 계열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결성한 집단이다. 당시 청명당은 호론계통의 학문을 추상적이고 가볍다고 보는 김창협, 이재, 박필주 같은 낙론 계통으로 구성된 별도의 정파이다.

 벽파는 정순왕후를 방패로 사도세자는 노론의 죄인이므로 죄인의 아들은 왕위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태조의 자손 중 아무나 왕위를 이을 수 있지 않은가? 라는 논리를 폈다. 즉, 벽파는 노론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순왕후를 중심으로)외척당의 정치간여도 옳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들은 정조의 정치원칙을 배신한역적으로 정순왕후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노론은 탕평당의 척신정치와 사도세자의 처신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면서 동당, 남당, 중당 3파로 분열된다. 이 중 홍계희와 조영순이 주축이 된 남당은 노론의 여론을 선도하는 집단임을 자처하였지만 실은 이들이 실권자인 왕실외척들과 결합한 탕평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었다. 반면 동당은 사도세자 보호에 주력하면서, 점차 탕평당의 전권을 비판하는 청류당으로 뭉쳤다.

 

남인 정파 중 청류당은 1722년 경 청론을 표방하는 새로운 정파로 출발하였다. 노소론이 대립하는 심각한 정치상황에서 노소 두 당파에서 이용당하지 않고 자신의 의리를 펼 수 있는 정세인가를 두고 각각 문외파, 문내파, 중립파로 갈라졌다. 이들 중 문외파가 바로 청남이다. 이들은 혼란한 시기를 계기로 정계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자는 입장이다.

 

이들은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신서파와 공서파로 분열되어 정조 사후 와해되고 만다.

반면 문내파는 청남정파에 정면으로 도전한 기사남인의 지도자 권대운, 김덕원의 손자인 권중경, 그리고 김화윤 등이 이끈 정파였으나 1728년 무신란에 적극 가담했다 완전히 몰락했다.


소론 준론은 임인옥사를 전후로 결집된 소론의 강경파이다. 노론주류를 역적당으로 보고(택군) 동시에 경종의 처분이 전적으로 옳다는 입장을 견지한 소론 주류에 속한다. 임인옥사에서 영조를 직접 공격한 소론 급진파는 영조 즉위 직후 사형당한다. 그러나 이광좌, 이종성, 박문수, 오명항 등은 영조의 즉위를 도우고 무신란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래서 영조도 이들 소론준론계 인물을 가장 신뢰하고 가능하면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조의 을해옥사를 계기로 더 이상의 붕당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강화학파로 이어진다.


청명당은 영조 46년을 전후하여 노론계 일각에서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홍봉한의 북당에 반대하여 비밀결사 형식으로 결집된 정파이다. 이 정치결사는 12명이 모여 "맑은 의논을 회복하여 넓히고 사대부 기풍을 숨어서 부지한다"는 다짐에서 시작한다. 이 결사가 영조 48년에 드러나면서 대파란이 일어난다. 이들은 사림의 공의를 존중하여 척신의 정치간여를 배제하고, 탕평당의 사리추구를 견제하겠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이들의 선배는 대체로 의리에 투철한 청류당 정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야 한다는 준론탕평론의 지도자들이었다. 즉 송시열 계통의 호론계통이 아니라 이재, 김창협, 박필주를 잇는 낙론 계통의 학통이었다. 이들은 서울지역에 거주하며 도시적분위기와 유통경제의 발달을 이해함으로써 시대와 사람의 변화에 적응하는 정치적 변화를 긍정하였다. 즉 중국의 새로운 문물수용에 재빠르게 대응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정조년간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강력한 정파였으나, 홍국영의 축출과 사도세자 문제를 놓고 결정적으로 분열된다.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판결한 영조의 처분을 뒤집는 것이 노론의 정통의리 전체를 뒤집는 사태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시파와 벽파로 갈라서게 된다.

 

시파-정조 측근 노론
  -규장각 각신
  -북학파
  -서얼 북학파(검서관)
  -소론 준론계(강화학파)
  -남인 청남계

중도파-노론 온건파(시파적)
  -노론 강경파(벽파적)

벽파-노론 강경파(산림)
  -노론 중도파
  -소론에서 전향한 노론
  -남인 중도파

 

 

총정리 : 계파 분리

---사림파---
사림파의 거두 : 김종직

사림파란 훈,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이 끌어들인 파로써 훈구,척신 세력을 비난하며 선비정신이 강한파

---훈구세력---
단종폐위사건때 공을세운 파

이때부터 권력을 독차지하였으며 권력을 남용하였다.(단종비 송씨부인의 원수들/송씨의 몰락을 주도한 선비무리)
이후 훈구세력이 사라지면서 사림파는 또 두 파로 나뉘게 된다... 그게 그 유명한 동인 서인

--동인--
거두 : 이황 , 조식
이황 , 조식의 사상을 따르는 문파(영남학파)

--서인--
거두 : 이이 , 성혼
이이 , 성혼의 사상을 따르는 문파(기호학파)

그리고 나중에 선조때 서인파의 대장을 맡고있던 정철을 계략을 써서 파직,유배시키면서  처벌에 대해 동인은 또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게 북인 남인
(위에님 정여립 모반사건은 동인을 대거 축출시키기 위한 서인의 계략)

--북인--
과격파 , 유배된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파
거두 : 이산해

--남인--
온건파 , 정철을 죽일 필요까진 없다는 생각을 가진 파
거두 : 유성룡
나중에 광해군 때 북인은 또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 짐

--대북--
광해군 지지파
거두 : 이이첨,정인홍 등


--소북--
광해군 반대파 (영창대군지지파)
거두 : 박동량 등
이때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서인이 권력을 잡죠 여기서 노론과 소론으로 서인도 분열이 됩니다.

--노론--
인조반정 공신파

--소론--
인조반정 관망파(구경)
나중에 사도세자가 죽자 노론은 또 다시 분열된게 벽파와 시파

--벽파--
사도세자 죽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진파

--시파--
사도세자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럴 것까지는 없었다는 생각을 가진파. 이때 힘이 약했던 남인, 소론도 시파에 가담.


 

출처 : 파테마타 마테마타.
글쓴이 : 귀수마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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